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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렌타인 데이
    발렌타인 데이 2월 14일은 발렌타인 데이( St. Valentine's Day)이고 3월 14일은 이른바 와이트(White Day)이다. 어른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날이지만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에게는 무척 의미 있는 날로 여겨진다.3세기경 로마시대 때에 원정을 떠나는 젊은 병사가 결혼을 하려면 반드시 클라디우스 2세 로마황제의 승낙을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발렌타인 사제가 서로 사랑하는 어느 젊은 연인들을 황제의 허락 없이 결혼을 시켜주어서 황제의 명을 어겨 마침내 처형을 당해 순교하게 되었다. 그후 발렌타인 사제의 순교 일을 축일로 정하여 그날을 기리기 위해 어버이와 자녀들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카드에 적어 교환하다가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남녀가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변모하였다.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여자가 평소에 사랑하고 싶었던 남자에게 쵸콜렛이나 어떤 개성이 담겨진 선물을 주므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다. 사랑의 상징으로 쵸콜렛을 선물하는 것은 18세기에 엽색가로 알려진 카사노바가 사랑을 유발시키는 마약으로 쵸콜렛을 선전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주로 하트(heart)모양의 빨강 색 쵸콜렛을 정성껏 포장하여 남자에게 선물하는데 유럽에서는 붉은 장미나 세인트폴리아 같은 정열의 꽃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기도 한다. 와이트 데이는 쵸콜렛을 받았던 남자가 발렌타인 데이 한달 후 3월 14일에, 여자에게 꽃과 사탕을 선물하므로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백화점이나 상점들의 상혼(商魂)에 편승하여 한국에서 만들어진 젊은이들의 문화이다. 각종 매체의 광고를 총동원하고, 백화점이나 상점 등에 특설 코너를 마련하여 예쁜 모양의 쵸콜렛 몇 개를 과대포장해서 젊은이들의 사랑을 부추겨서 비싸게 팔아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자유로운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므로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좋은 문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금번 발렌타인 데이에 선남 선녀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 나라에도 예전부터 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날이 있어왔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보면, 옥황상제의 마음을 거슬려서 남녀가 은하수 동쪽 과 서쪽에 살게된다.견우와 직녀는 용서를 빌었지만 1년에 음력 칠월칠일 칠석날 딱 한번 만나도록 허락 받는다. 일 년을 기다려 만나기 위해 나왔을 때에는 은하수가 두 사람사이를 가로막아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까마귀와 까치들은 너무 불쌍해 곧 서로의 몸을 이어 다리를 만들어 두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오작교이다. 이런 우리의 오작교 설화를 사랑 고백의 날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외국 문화인 발렌타인 데이가 우리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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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0
  • 언론인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언론인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박재영 여주시의회의원 자본주의가 점점 발전하면서 사회는 더욱 복잡해졌고, 이해관계도 한층 복잡해짐으로써 사회적 갈등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실 자본이 주인인 사회에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존중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세상은 더욱 요원해지는 것같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며 사적이익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사적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방식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고, 가장 일반적인 것이 혈연 지연 학연을 토대로 구축된 인적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구축된 인적관계를 토대로 사적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정의롭고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제도가 작동되기 힘들게 된다. 국민 다수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기 보다는 소수의 지배집단과 특권층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의 정립은 결과적으로 사회 갈등을 촉발시키고 심화시킬 뿐이다. 바로 이런 소수의 지배집단과 특권층의 특혜를 차단시키고, 다수 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역할들 중의 하나가 언론인들의 역할이라는 생각이다. 아동, 청소년, 여성,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공동체 구성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더불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지지하고 배려하고, 그에 합당한 사회적 제도들을 만들도록 여론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언론인들의 정의로운 역할이라는 생각이다. 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일정기간까지는 우리의 언론환경은 매우 긍정적으로 개선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통폐합되었던 언론이 다시 살아나고, 지역과 지방에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든 언론사들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게 되었다. 지역의 발전과 주민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한 언론의 역할이 증대되기도 했지만, 일부 언론인들 스스로가 언론의 중차대한 역할을 방기하고, 주민들의 질타와 불신을 받을 수 있는 저질스런 행태를 보임으로써 언론인들이 도매 끔으로 ‘똥 꾼’이라는 공격을 받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현실에서 지방지나 지역지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이 급여만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이런 객관적 상황이 언론인들을 존경받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기업이나 상인들, 그리고 공무원들의 약점을 들춰내서 떡값명목의 광고비를 강요하거나, 명절이나 행사시마다 손을 벌려 뒷돈을 요구하는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언론인들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든든한 지원자나 벗이 될 때, 우리사회는 한층 더 성숙된 민주주의 사회로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존경은 아닐지라도 존중받는 언론인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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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2
  • 길들여짐과 소통
    길들여짐과 소통 김춘석 여주시장 어린 왕자라는 책이 있다. 아이들 동화 같기도 하면서 제법 심오한 내용으로 어른들도 읽어 보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요즘엔 책의 종류도 다양해 전문 성우들이 책을 녹음해 소리로 들려주는 오디오 북이라는 게 있다. 얼마 전 집에 온 며느리가 안아 달라고 보채는 손녀에게 이 책을 오디오 북으로 들려주며 달래고 있는 것을 봤다. 이제 갓 4살 난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는 할까 궁금했지만, 스피커에서 나오는 신기한 음악소리와 앳된 어린 왕자의 목소리에 마냥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습이 신통할 뿐이었다. 내 자식 어렸을 때보다 손자·손녀가 훨씬 더 예뻐 보인다는 옛 어른들 말씀이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암튼 손녀 옆에서 무심코 듣고 있자니 마치 아이가 모든 어른들에게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하고 훈계하는 것 같았다. 책 첫 머리부터 아이들의 상상력을 이해 못하는 어른들의 무심함과 아이의 친구를 부모의 소득과 집 크기로만 평가하는 어른들의 편협함을 꾸짖는다. 그래서 지은이는 말한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자신이 될 어른들을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딘지 뜨끔함이 느껴지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책 속의 ‘어른’에서 비껴 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지구에 도착하기 전 어린 왕자가 별들을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각각의 삶이 우리 어른들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그것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주정뱅이, 은행에 저축해서라도 세상 모든 별들을 혼자 다 갖겠다던 탐욕스런 상인, 숭배 받기만을 바라는 허영꾼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리의 자아상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여우와 어린왕자의 만남 부분이다. 지구에 친구가 없어 외로웠던 그는 여우에게 친구가 돼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여우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만다. 대신 시간과 노력을 들여 특별한 관계를 만들고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될 때, 다시 말하면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졌을 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으로 그 소중함을 볼 줄 알아야 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우가 읽어주는 책이 다 끝나고 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득 아이가 나를 길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과 길거리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보기만 해도 손녀가 보고 싶어진다. 매 주말이면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니 길이 들어도 단단히 들은 모양이다. 나는 소통도 길들여짐과 길들임이라고 믿는다. 여우와 어린왕자가, 나와 손녀가 그러하듯 서로 일방적이지 않고 상대방의 몸짓 하나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곁에 있지 않아도 기다림 그 자체가 즐겁다. 상대방과 말이 안 통한다고, 꽉 막혔다고 불평하지 말자. 진정 소통을 원한다면 누군가에게 나를 길들여 달라고 말해 보자. 어린왕자에 길들여진 여우가 그전엔 아무 의미가 없던 금빛 밀밭을 보고 어린 왕자의 노란 머릿결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 누군가는 길들여짐으로 나의 진심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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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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